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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2.07.18 04:56:44 조회: 3,972 추천: 26 |
정체불명의 한 사나이가 공기총의 방아쇠를 연속해서 당겼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서울 삼성동 엔씨소프트 사무실. 지난 5월초 오전 10시쯤이었다. 그는 공기총을 들고 계단을 올라오면서 회사 직원을 향해 공기총 한발을 발사했고, 이어 고객지원센터로 들어왔다. 흥분한 사나이는 유리창을 향해 한 발을, 그리고 고객지원상담원을 향해 또 한 발을 날렸다.
사무실은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했다. 10여분쯤 지났을까. 경찰 사이렌 소리가 들렸고, 그 사나이는 현장에서 연행됐다. 다행히 총에 맞은 사람은 없었다.
뒤늦게 밝혀진 사건경위는 황당하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그 사나이는 평소 리니지(엔씨소프트에서 개발한 온라인게임) 게임을 자주 했던 30대 중반의 샐러리맨 K씨. 그는 게임을 더 잘하기 위해 2백만원어치의 아이템을 추가로 구입했다(투명망토 등 게임에 필요한 아이템은 시중에서 20만∼30만원 혹은 3백만∼4백만원을 호가한다). 이를 통해 한층 계급이 높아진 이 사나이는 얼마 후 아이템을 구입했던 방식대로 되팔려고 했다.
그러나 회사의 게임 관리자가 이를 적발, 약관을 어겼다는 이유를 들어 그 사나이의 계정을 폐쇄했다. 더 이상 게임에 참여할 수 없도록 봉쇄한 것이다. 그는 회사에 항의도 해보고, 인근 경찰서에서 사정도 얘기했지만 별무소득이었다. 결국 그는 공기총을 들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엔씨소프트는 무장경비원을 회사 문 앞에 배치하고 육중한 강철 문으로 출입구를 막았다.
‘가상세계에서 온 침입자’를 차단하기 위해서다.
이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에 불과할까. 가상사회, 어쩌면 우리는 대부분 알고 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때론 그저 철없는 청소년들의 장난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마치 아바타 시장이나 게임이 가상세계의 모든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어른도 많다. 하지만 아직 누구도 가상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이곳에서 어떤 갈등을 갖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가상사회는 선생님도 없고 문화도 없는 불모지다. 그곳은 오로지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이 지배한다. 레벨이 빨리 올라가려면 많은 적들을 죽여야 하고, 힘있는 세력에 붙어야 한다. 이는 피비린내나는 마피아 조직에서 청소년을 양육하는 것과 같다.
‘비트의 문명, 네트의 사회’의 저자 라도삼 박사(중앙대 신문방송학과 강사)는 “앞으로 10년 동안 한국은 욕구의 다양성이 가상사회를 통해 쏟아지는 거대한 실험장이 될 것”이라며 “사회는 이런 다양성을 어떻게 현실에서 조화시킬 것인지 시험당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자살 사이트·원조교제 등 우리가 지금까지 놀랐던 현상들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이에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젠 가상사회를 하나의 국가로 바라봐야 한다”며 “가상사회에도 학교를 세우고, 문화를 만들며, 역사를 써야 할 시기”라고 강조했다. 가상사회를 가꾸지 않기 때문에 문제점이 자꾸 노출된다는 얘기다.
가상사회가 국가로 인식돼야 한다는 주장은 여러 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일본 매킨지 출신의 컨설턴트 오마에 겐이치는 ‘국가의 종말’이란 저서에서 “정보기술의 발전에 따라 이제 세계는 근대적 영토로부터 벗어나 도시를 기본단위로 한 지역국가(Region State)로 발전할 것”이라며 “이 지역국가는 바로 근대국가에서 이탈된 비트화된 도시”라고 주장했다.
라도삼 박사도 “네트혁명으로 세계의 지도는 다시 그려지고 있다”며 “국경선도, 군사적 대립도, 영토전쟁도, 규제나 간섭도 없는 국가가 생겨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곳은 스스로의 선택과 배제에 의해 행하는 등록(Coding)만 있을 뿐”이라고 라박사는 전했다.
이미 외국에선 가상사회를 하나의 국가로 간주, 경제적 효용가치에 대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최근 영국의 BBC방송은 소니가 만든 게임에 등장하는 가상의 국가 ‘노라스’(Norrath)의 1인당 GNP가 2천2백24달러라는 뉴스를 내보냈다. 이 방송은 “미국 전문가들이 계산한 노라스의 국민소득수준은 불가리아보다 높다”며 “가상게임에서 사용하는 아이템 경매와 불법으로 거래되는 아이템 교환 가치를 추산한 결과 이같은 수치가 나왔다”고 밝혔다.
가상사회의 가치 평가작업이 벌어지면서 벌써부터 기업들은 이곳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미 패션·음반·엔터테인먼트 관련 기업들은 가상사회 구현 업체와 사업제휴를 맺었다. 대기업들도 회사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가상의 국가를 건설할 것이란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왕상 LG투자증권 애널리스트(인터넷 분야)는 “엔씨소프트는 게임을 통해 가상사회를 건설했고, 이곳 시민들이 의미 있는 활동을 벌여 실제 기업 가치를 높였다”고 이 회사의 성공요인을 분석했다. 그는 “삼성과 LG 등 대기업들도 기업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소비자들을 유인할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들고, 이를 통해 사이버 세계를 건설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가상세계가 재미있는 것은 현실과 다른 시장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국내 최대의 아바타 사이트인 네오위즈의 사례를 보자. 아바타(avatar)란 분신 또는 화신이라는 의미로서 가상사회(게임)에서 이용자를 대신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다. 네오위즈는 아바타에 맞는 각종 옷·액세서리 등을 내놓고, 이를 이용하는 유저들에게 1천∼6천원까지 현금을 받는다. 청소년들 코 묻은 돈으로 기업이 운영될 수 있을까 싶지만, 월간 20억원의 수입을 거둘 정도로 성공적이다.
최근 이 회사는 미국 완구업체 마텔과 사업제휴관계를 맺었다. 마텔은 포천지 선정 1백대 기업에 드는 대기업으로 바비인형을 개발, 제작하는 업체다. 바비인형에 사용되는 옷은 현실 사회에서 불티나게 팔리는데 이 때문에 바비인형이 패션의 유행을 선도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네오위즈는 바비인형에서 사용되는 최신 옷을 전송받아 이를 아바타용으로 판매한다. 이 가상세계에선 최고가(6천원)에 팔리고 있으며, 인기도 좋다.
가상세계의 시장은 바비인형이란 실체가 팔리는 것이 아니고 바비인형 옷이란 브랜드만 팔린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바타에게 옷을 입히는 플레이어들이 마치 자신이 바비인형의 옷을 입은 것처럼 느껴진다고 하는 점이다. 네오위즈의 한 회원은 “내가 꼭 바비인형이 된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 점이 미국의 거대 기업 마텔사가 제휴를 결심하게 된 이유였다. 이젠 소유하지 않고도 경제적 효용감을 맛볼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김진호 오즈인터미디어 사장은 “앞으로 대기업들은 가상사회의 시민들을 상대로 마케팅 전략을 세워야할지 모른다”며 “가상사회에서 유행하는 브랜드가 역으로 현실사회에서도 인기 있는 브랜드로 팔릴 날이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네오위즈의 경우처럼 가상사회가 현실사회에 활발하게 영향을 미치는 사례는 속속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2천만명의 회원을 보유한 다음커뮤니케이션이다. 서울시민의 배에 해당하는 인구를 보유하고 있는 이 곳은 취미를 공유하는 사이버 모임(이곳에선 카페라고 불린다)이 활발하다. 예컨대 폴로 매니어들이 만든 폴로카페에선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신제품을 소개해주기도 한다. 폴로 회사로서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재즈카페 회원들은 가상사회에서 만난 회원들과 취미를 공유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아예 서울시내 카페 한 곳을 인수, 직접 경영한다. 취미가 생산활동으로 연결돼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사회분야의 전문가들은 “이미 한국에는 싱가포르의 富 이상을 생산하는 가상사회가 존재한다”며 “이는 한국이 한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한다.
이미 청소년들은 자신이 쌓은 게임의 노하우가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의 값어치를 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우리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경제활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에게 경제와 기업의 가치, 공동생활의 예의 등을 가상사회에서 가르쳐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가상사회가 황폐화되면 현실사회 역시 폐허가 될 것이 뻔하다. 가상세계에서 공기총을 들고 우리 집을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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